20230204 정성스러운 일터로서 나의 정당
비오는 월요일이네요.
아침에 일어나서, 환기를 시키며 가장 먼저 보는 문장 하나가 있어요.
“인생은 노래와 춤으로 수놓는 흥미로운 축제가 아니라, 수고와 노력을 요하는 정성스러운 일터다.”
늘 흥미롭고 재밌다면, 그보다 좋은 인생은 없겠지요. 그래도 고생스러운 날들이 더 많은 게 우리 현실이잖아요. 우리, 잘 견뎌내 봐요.
지금 제 일터는 정당이에요. 복지 운동 활동가로 5년 안 되는 시간을 보내고, 정당에 들어와 출마자로, 당직자로, 지역당 책임자로 살아내는 게 그간의 내 일상이었어요. 사회운동과 정당 운동을 겸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고, 사회운동의 연장에서 정당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사회운동이라고 하면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나요? 성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여성운동, 일하는 사람들의 권익을 위한 노동운동이 있을 거고요.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는 성 소수자 운동, 지하철역에서 외치는 장애인 이동권 운동, 뭇 생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생태‧환경운동도 있지요. 지글지글 끓는 지구의 전환을 바라는 기후정의 운동도 있고, 더 근본적인 구조변화를 주장하는 체제전환 운동 등이 있을 거예요. 인종차별반대 운동은 물론이고,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도 있어요. 지역사회 내에서 더 많은 연대를 바라는 공동체 운동도 있지요.
사회운동은 의제를 찾아내고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죠. 이들 사회적 의제를 예산과 법안이 수반되는 공적 의제 혹은 공공 정책 의제로 전환하는 일은 정치가 해요. 사회운동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이를 “구속력 있는 공적 명령”으로 전환해 내려면 정치의 힘이 필요하죠. 기존 정치세력이나 주류 정당의 힘을 빌려서 하면 좋은데, 그들은 그들 관심사가 따로 있어요. 가끔 사회운동의 의제를 받을 때도 있지만, 결정은 우리가 아닌 그들이 해요.
문제 제기 집단과 정책 결정 집단 사이의 분리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어느덧 사회 의제와 정치 의제 사이의 간격은 계속 커졌죠. 정치는 오로지 영향력만 추구하는 양당의 독과점 구조가 되었어요. 국회 의석의 95%, 지방의회 의석의 98%가 양당이 독식하고 있지요. 양당제가 아니에요. 양당제라면 하나의 정당 안에 노동파도 있고 복지파도 있고 생태파도 있어야 하지만, 지금 우린 친윤과 비윤, 친명과 비명만 있어요. 그래서 정치학자들은 우리 정치를 양당제라고 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양극화 정치’에 빠져들었다고 진단하는 거예요.
양극화된 양당 독과점 구조에서 사회적 요구는 다원화될 수 없어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대표될 수도 실현될 수도 없어요. 기존 정당들의 온정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문제 해결 집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우리도 정치의 힘을 키워야 하겠고요. 문제 제기와 문제 해결 사이의 가교가 필요하고, 저는 우리 스스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 평등한 기회”를 제공해요. 그 기회는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의 힘”에 비례해 주어지고요. 시민의 힘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려면 좋은 정당이 필요해요. 그간 우리는 좋은 정당을 만드는 일에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비용을 치렀어요. 실패의 경험도 이젠 자신으로 바꿔가야 할 때예요. 앞선 사람들의 수고와 피, 땀, 눈물을 헛되게 하지 않게, 앞으로 10년은 조금씩 결실을 키워가길, 나는 원해요. 한 번에 다 이룰 수 있다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일을 꾸준히는 할게요.
오늘 편지는 많이 길어졌네요. 내 고민이 당신에게 조금은 닿았을까요?
2024년 2월 5일
여덟번째 김혜미레터